
<사진: 정재만 한국뉴욕주립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교수>
매일 아침 전국의 주방에서 무심히 버려지는 양파 껍질, 아보카도 씨앗, 시든 시금치와 비트 자투리들. 현대 도시 문명은 이를 ‘음식물 쓰레기’라 규정하며 골칫거리로 취급한다.
하지만, 평생을 천연의 빛깔을 좇아온 천연염색가의 눈에 그것은 미지의 색을 품고 숨죽인 ‘보물창고’다. 최근 글로벌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의 화두 속에서, 이 이른바 ‘식품 폐기물 (Food Waste)’을 활용해 자연의 진정한 색(True Colors)을 추출해내는 시도들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단순히 쓰레기 종량제 봉투의 무게를 줄이는 차원의 환경 운동이 아니다. 인간의 맹목적인 소비가 지워버린 ‘자연 고유의 스펙트럼’을 복원하는 격조 높은 문화적 성찰이다.
양파 껍질을 달여내면 대지를 닮은 묵직한 황주황색이 빛을 발하고, 무심코 던져둔 아보카도 씨앗은 수줍은 처녀의 뺨 같은 복숭아 빛깔의 연분홍색을 선물한다. 적양배추의 이파리는 궁중의 예복을 연상시키는 깊은 보라색을, 시든 시금치는 싱그러운 초록의 생명력을 다시금 뿜어낸다.
이렇게 얻은 색들은 베이킹의 아이싱을 물들이는 안전한 생명의 식재료가 되기도 하고, 무명과 비단을 적시는 지속가능한 예술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버려진 것들이 인간의 손길을 거쳐 가장 고귀한 미(美)로 환생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업사이클링(Upcycling)’이라는 현대적 개념이 실은 오래된 자연의 섭리였음을 깨닫는다.
대학 강단에서 미래의 인재들과 디자인과 기술의 융합을 논할 때, 그리고 연구실에서 천연염색의 대중화와 산업화를 고민할 때마다 필자가 붙잡는 화두는 결국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이 오래된 미학은, 오늘날 기후위기 시대의 가장 강력한 대안이자 글로벌 트렌드가 된 ‘바이오 색소(Bio-pigment)’ 산업과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조상들이 산과 들의 약재에서 색을 취해 삶을 풍요롭게 했다면, 현대의 우리는 도시의 일상에서 버려지는 스크랩을 모으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전통을 시작해야 한다. 냉동실 한구석에 아보카도 씨앗을 모으고 양파 껍질을 따로 담아두는 작은 실천이야말로, 메마른 일상에 격조 높은 미학을 들여놓는 첫걸음이다.
화학 염료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규격화된 색을 대량 생산해 내지만, 자연의 염료는 결코 같은 색을 허락하지 않는다. 재료가 자란 토양, 끓이는 시간, 그날의 습도와 물의 성질에 따라 매번 미묘하게 다른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바로 그 ‘경이로운 불완전함’이야말로 천연이 가진 최고의 매력이자, 예측 가능함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자연이 건네는 은밀한 위로다. 속도와 효율의 노예가 된 우리가 자연의 느린 변화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비로소 삶의 여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오늘날 K-컬처와 K-디자인은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축으로 우뚝 섰다. 이제 대한민국 전통 천연염색이 지닌 깊은 정신성에 이러한 글로벌 생태 트렌드를 접목한다면, 그 문화적 · 산업적 부가가치는 상상 그 이상이 될 것이다. 전통은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순환하며 진화하는 생명체여야 한다.
오늘 저녁,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다 마주치는 채소 자투리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시길 권한다. 썩어 없어질 운명의 쓰레기통 속에서 지구를 살릴 찬란한 빛깔을 건져 올리는 일, 그 고요하고도 위대한 반란에 동참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을 예술로 만드는 일이다.
<필자 소개> : 고려대 환경경제학 박사로 현재 한국뉴욕주립대학교 교수이자 대한민국 천연염색 명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천연염색 전문기업 '약초보감'의 대표를 맡아 전통 색채의 현대화와 글로벌 산업화를 이끌고 있다.
(농업환경뉴스)



















